책과 독서, 우리말

사회과학 학습을 위한 책 소개(김문주)

Illinois 2005. 8. 25. 16:32
학습교안의 추억

사상과 이념이 운동과 노선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에는 학습 교안敎案이나 커리큘럼curriculum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80년대, 대학이든 공장이든 운동조직이든 학습팀이 무수히 많았고 그만큼 체계적인 학습도서목록도 즐비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그 추천목록들은 남아 있었고 줄어들긴 했으나 학습모임을 진행하는 그룹들 사이에 돌았다. 90년대 후반에도 종종 학습커리를 필요로 하고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기말을 지나 몇 년 동안 그런 문화는 사라졌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려는 사람이 조직되지 않고 어렵사리 의기투합해도 그 모임들은 대부분 책 몇 권을 읽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개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상과 이념을 꾸준히 연구하며 실천하는 조직운동이 미약해졌기 때문이다.

알튀세의 후예들은 맑스에게서 구조주의를 찾아낸다. 네그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맑스의 노트에서 자율주의에 도움이 되는 부분에 밑줄 긋는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책들을 펼친다. 공공연하게 자신을 스탈린주의자라고 소개하거나 생각하지는 않지만 맑스레닌주의라는 공식명칭으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충실한 교과서와 도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각 단체에 젊은 노동자나 학생들이 활동가로 충원되지 않는 가운데 그들은 그 교리를 폐기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은 채 변함없는 세월을 보낸다. 습관이 지속되면 관성이 되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일도 드물어지고 무감각해 진다.

각론도 없고 토론도 없다

노동자를 위한 교육과 진보정당의 당원교육에 사용할 참고서, 청년학생들의 지적 갈증에 도움이 될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비록 조직적, 실천적인 필요가 덜 하다 해도 여전히 가치 있는 작업이다. 다만 인류의 전 역사 특히 경제사, 근대 이후의 정치사상사, 구체적인 노동운동사, 각 나라의 혁명사를 모두 아우르는 도서목록이나 학습커리는 이제 80년대처럼 만들어 질 수 없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 분야의 각론을 마련하고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목록을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한편 그것을 소화할 대중 혹은 활동가가 없는 상황에서 무슨 신명이 나서 그 작업을 하겠는가. 사상이론의 헤게모니 투쟁이 없는 가운데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을 뿐이다. 만나서 토론하는 것도 피곤하게 생각할뿐더러 토론한다고 해도 언어가 달라서 시간낭비하기 일쑤다.

이러한 시절에 한 개인이 맑스주의, 혁신정당, 노동자운동과 관련한 종합적인 학습커리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어느 집단이 뚜렷한 목적의식과 조직의 목표로 작업해도 어려운 과제를 어떤 개인이 대담하게 개괄하겠는가. 또한 도서목록을 추려볼 순 있으나, 어떤 책을 왜 뺐고 왜 그 책을 높이 평가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기 어렵다. 도서목록을 편성하는 것조차 특정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자신이 배우지 않았거나 읽지 않은 책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 나온 더 좋은 책을 추천하기 보다는 자신이 선배로부터 또 그 선배는 그 이전의 선배로부터 추천받은 낡은 책을 계속 권하곤 한다.

젊은 날의 영혼은 용감하다.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스스로 확신이 있으면 패기 있게 일정한 진실을 완전한 진실이라고 외치곤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폭넓은 교양을 쌓을수록 함부로 도식화를 하거나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게다가 과거의 사회주의는 오염되었고 현재의 사회주의는 조롱의 대상이고 미래의 사회주의는 전망을 찾을 수 없는 데, 어떤 확신으로 사회주의의 가치를 담담하게 논하겠는가.

다시 용기를 내어 담담하게

최근 나는 프로메테우스 Radical Review를 통해 내가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싶은 책들을 소개했다. 매번 그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 책들의 제목을 모은다고 해서 어떤 적절한 목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 가운데 학습모임을 준비하는 분이 입문자들이 읽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노동운동에 도움이 되는 역사서나 철학서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메일을 통해 구체적인 필요와 교육대상을 확인했고 예전에 메모해둔 목록들을 보완하여 답장을 보냈다.

내가 서평을 쓸 때는 그 책의 첫 표지부터 뒷 표지까지 모두 읽는다. 그러나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할 때는 완독하지 못한 책들도 포함한다. 맑스 전기를 예닐곱 권 읽었어도 다 소개하진 않는다. 저자나 역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필 그 책이 읽기 쉽다는 이유로 선정되기도 한다. 문학과 예술, 상식과 일반교양의 영역에서 좋은 책들이 많으나 제외한다. 한글로 번역되거나 서술된 것 가운데 고른다.

내가 작성하여 조심스레 소개한 도서목록을 필요로 하는 사람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한다. 그 내용과 관련한 어떤 비판과 충고도 겸허히 경청할 것이며,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할 것이다. 전체적인 보충이든 각 주제의 보완이든 제시된 책들 이외에 추천할만한 책이 있다면 언제나 환영한다. 관심 갖고 도움 주는 분들이 많다면 이런 추천 도서목록은 매년 수정보완 될 것이다. 아래의 자료는 편지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학습을 위한 책 소개


‘노동자운동을 위한’ 학습과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겠지요. 모든 이론은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고 모든 혁명운동도 혁명가들이 만들어온 궤적입니다. 그러므로 전기를 읽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 기본적인 책들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 푸른숲 ***
: 지금까지 나온 전기 가운데 가장 좋은 맑스 전기입니다. 입문자부터 중급자까지 도움이 됩니다. 입문자에겐 맑스에 관한 선입견을, 중급자에겐 편견을 깨줄 책입니다. 전기를 먼저 읽어 각 주제들의 전체적인 위치를 알게 되면 다른 학습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보리스 보브 / 동아일보사 *
: 얇고 그림이 많은 책입니다. 지루하지 않으며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레닌》로버트 서비스 / 시학사 *
: 20세기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국가들을 이해하는 데, 레닌은 핵심 키워드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 / 녹색평론사 ***
: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살면서 꼭 성찰해야할 주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파헤친 책입니다. 학습모임의 첫 번째 책으로 적당합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리오 휴버만, 책벌레 ***
: 노동자의 관점에서 본 경제사입니다. 교과서로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오래 전에 저술된 책이라서 최근 세계에 대한 분석이 없습니다.

<공산주의 선언> 맑스, 엥겔스 / 박종철출판사 ***
: 이 팜플릿을 읽지 않고 현대의 노동자운동과 좌파담론을 이해할 순 없습니다.

《사람의 살림살이》폴라니 / 풀빛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홍기빈 / 책세상 **
: 칼 폴라니의 저작들은 다 좋습니다. 이 책은 맑스와 폴라니의 경제(사)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정치경제학 비판

(1)《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만 / 책벌레 ***
(2)《경제학을 만든 사람들》 류동민편역 / 비봉출판사 **
(3)《두 경제학의 이야기》 이정전 / 한길사 **
(4)《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 그린비 *

(1)과 (2)는 입문자들이 읽으면 좋습니다. (2)는 경제학의 상식들과 주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해 놓아서 좋고 특히 편역자의 생각이 담겨 있지 않기에 좋습니다. 속도를 빨리하여 통독하면 됩니다. (3)과 (4)는 보다 심화된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들이 학습되고 나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백의)과 《자본》(비봉 혹은 이론과 실천)에 도전하거나 그 연구서들을 공부하면 됩니다. 거꾸로 《요강》과 《자본》을 읽을 때 (4)를 참조해도 좋습니다. (4)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자본》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이란 부록은 독자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 철학과 사상

(5)《사회철학에의 초대》 요제프 레만 / 학민사 **
(6)《베버와 마르크스》 칼 뢰비트 / 문예출판사 ***
(7)《마르크스에서 헤겔로》 게오르그 리히트하임 / 문학과지성사 **
(8)《헤겔에서 니체에로》 칼 뢰비트 / 민음사 *
(9)《에피고넨의 시대》 정문길 / 문학과지성사 **

(5)는 입문서입니다. 지난날의 '변증법적 유물론'류와 주제가 같지만 훨씬 낫습니다. (6)은 짧지만 매우 심오한 논문입니다. (7)은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리히트하임은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맑스주의자들의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들의 논의를 논평하고 있습니다. (8)은 19세기 사상의 종합정리용입니다. 맑스 이전과 동시대의 사상들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 책이 너무 두껍다면 (9)도 좋습니다. 그러나 전문연구자가 아니라면 (8)과 (9)는 어렵습니다.

- 참고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맑스박사학위논문 / 그린비 **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
《마르크스 사상사전》보토모 편, 임석진 역 / 청아 ***
《경성 트로이카》안재성 / 사회평론 **

박사학위논문은 전문가용입니다. 80년대에 나왔어야 하는데 너무 늦게 번역되었습니다. 이 사상사전은 모든 학습에 참고해도 좋을 만큼 유용한 사전입니다. 다른 책들을 보다가 ‘개념, 범주, 인물’이 나올 때 참조하면 됩니다. 학습을 주관하는 선배라면 꼭 지니셔야 합니다. 토론하다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범주가 있으면 얼버무리지 마시고 더 연구해서 다음에 토론하자고 하시고, 사전을 참조하고 인터넷검색을 해서 다음 시간에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한 권의 소설은 이론서 열 권의 몫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운동의 주제에 대한 감동 없다면 학습능률도 떨어지고 실천 자체도 신명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기가 중요합니다. 맑스엥겔스 '전집'이나 '총집'이 번역되지 않았으므로 '선집'과 선집에 없는 단행본들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 노동자운동과 역사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톰슨, 창작과 비평사),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구해근, 창작과 비평사) 등의 책이 있고 홉즈봄의 저작들이 있습니다. 또한 역사비평사에서 나오는 여러 연구서들이 있습니다. 주제나 인물에 따라 찾아보면 되겠지요. 역사나 경제사가 얼핏 쉬운 것 같아도 '사상과 철학'의 관점이 없다면 서술도 불가능하고 이해도 난망합니다. 우선 폴라니나 리오 휴버만의 책을 읽는 게 안전합니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사, 가슴이 답답해지는 주제입니다. 한국혁신정당사를 개괄하는 책 하나 없고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노동자운동을 전체적으로 다룬 책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추천할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은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이고 **은 읽으면 좋은 책들이고 *은 참고용입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학습커리를 묻고 찾는 이들이 꽤 있었으나 근래에는 그런 물음이 없습니다. 실제로 학습을 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가 앞의 사회과학 서점들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공부해야할 책들을 체계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함부로 도서목록을 소개하는 게 어려워지는 데, 님의 부탁이 구체적이고 또한 새로운 학습모임들이 생겨나야 하고 생겨날 수밖에 없으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정리해 봅니다. 님과 동무들의 보람 있을 여정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김문주님 미니홈피]무엇을 할 것인가.    작성자 : 김문주
작성일 : 200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