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 경기 남부 산행(5행심, 산마늘, 원추리, 큰꽃으아리)
산에 들어 1시간 가량 도니 5행의 심을 봅니다.
송홧가루가 뒤덮였네요.
저도 산행 내내 뒤집어썼답니다. ^^
뿌리를 자세히 보니 이삼 년 가량된 것이더군요.
산행 중 같이 가신 분이 채취하신 산마늘(백합과)입니다.
(Tips : 백합과 식물은 뿌리가 백합의 뿌리처럼 덩이뿌리이다.)
개화기 : 5~6월
높이 : 40~70cm
자생지 : 경남북부, 강원, 평북의 깊은산 숲 속
자생조건
: 양지, 반음지
어린 싹은 물론 인경, 잎, 화경 모두 생식 가능하고 맛이 좋다. 정력(精力)에 좋다는 설과 장수(長壽)에 좋다는 얘기도
있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비늘줄기를 구충, 이뇨, 강장, 해독, 소화, 건위, 풍습, 진통, 강심, 진정, 건뇌 등에 쓰인다. 한기로 일어난 감기 증상을 제거시킨다.
마늘장아찌를 담가 먹으면 반찬으로도 좋은 영양식이다.
원추리(백합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뿌리가 맥문동과 흡사합니다.
원추리는 대개 노란 꽃이 피지만 더러 큼직한 분홍빛 꽃이 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원추리는 ‘근심풀이풀’, 곧 근심을 잊게 하는 풀로 널리 알려진 약초이다.
한자로는 훤초(萱草), 망우초(忘憂草), 금침채(金針菜), 의남초(宜男草), 황화채(黃花菜) 등으로 쓰며 어린 싹을 살짝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으면 약간 달면서도 부드러우며 담백한 맛이 난다. 큼직한 꽃을 차로 우려내어 마시면 은은한 꽃향기가 일품이다. 그리고 마음이 황홀해져서 근심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 한 형제가 한꺼번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형제는 슬픔에 잠겨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형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모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다. 그러나 동생은 부모님을 잊지 않으려고 무덤가에 난초를 심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흘러 형은 슬픔을 잊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동생은 슬픔이 더욱 깊어져서 병이 되었다. 그런 어느날 동생의 꿈에 부모님이 나타나 말했다.
“사람은 슬픔을 잊을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너도 우리 무덤에 원추리를 심고 우리를 잊어 다오.” 이 말씀에 따라 동생도 부모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고 슬픔을 잊었다고 한다.
이구화라는 사람이 쓴 「연수서(延壽書)」라는 책을 보면 “원추리의 어린 싹을 나물로 먹으면 홀연히 술에 취한 것 같이 마음이 황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풀을 망우초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키는 80~90cm쯤 자란다. 뿌리부분에서 가늘고 긴 잎이 돋아나는데, 잎은 끝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져서 끝은 뾰족하다. 여름철에 잎 사이에서 긴 꽃줄기가 올라와서 백합을 닮은 노랗고 큼직한 꽃이 핀다. 꽃줄기 끝에서 날마다 예닐곱 송이의 꽃이 새로 피고, 이 꽃에는 꿀이 많아서 벌들이 많이 모여든다. 높은 산의 풀밭에는 더러 수많은 개체가 군락을 지어 자라기도 한다. 더러 붉은색 꽃이 피는 것도 있고 보랏빛이 섞인 붉은 색의 꽃이 피는 것 등이 있으며, 꽃이 유달리 큰 것도 있으며 꽃이 겹으로 피는 것도 있다.
가짓수가 꽤 많아서 왕원추리, 큰원추리, 애기원추리, 각시원추리, 골잎원추리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나 다 같이 쓸 수 있다. 원추리는 약초라기보다는 요즈음에는 원예식물로 많이 가꾸는 편이다.
원추리 뿌리에는 맥문동을 닮은 길쭉하고 둥근 괴경이 여러 개씩 달리는데, 먹을 수 있어서 옛날에는 중요한 구황식물의 하나였다.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가 즐겨 파서 먹는다. 녹말을 비롯하여 단백질 같은 영양이 많고 맛이 괜찮아서 선조들은 허약체질을 튼튼하게 하는 자양강장제로 흔히 먹었다. 녹말을 추출하여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과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원추리 꽃술을 따 버리고 쌈을 싸서 먹기도 하고 밥을 지을 때 얹어서 먹기도 한다. 원추리 꽃을 밥을 지을 때 넣으면 밥이 노랗게 물이 들고 꽃향기가 배어서 특이한 향기가 나는 밥이 된다. 중국에서는 활짝 핀 꽃을 따서 펄펄 끓는 물에 데쳐서 말린 다음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원추리 꽃에서 향료를 추출하여 화장품이나 향수를 만들기도 한다.
옛날에는 흉격(胸膈)이라고 하여 사악한 기운이 영혼에 침입하여 생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데 매우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원추리나물은 변비를 없애는데에도 훌륭한 효과가 있다. 장기능이 나빠 변상태가 고르지 않거나 여행을 할 때나 긴장했을 때 생기는 긴장성 변비에 원추리나물을 먹으면 곧 변을 잘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원추리 어린 순을 따서 지푸라기로 무시래기 엮듯이 엮어서 처마 밑에 매달아 말려두었다가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이 있었다. 정월 보름날에 원추리나물을 먹으면 한 해 내내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원추리는 폐의 열을 내리고 진액을 늘리며 소변을 잘 나가게 하며 갖가지 균을 죽이는 작용이 있다. 폐결핵, 빈혈, 황달, 소변이 잘 안 나오는데, 변비, 위염, 장염, 인후염, 각혈, 자궁출혈 등에 쓸 수 있고, 해독작용이 있어서 독초를 먹고 중독된 것을 풀어준다.
중국 송나라 때의 의학자 소송(蘇頌)은 「도경본초(圖經本草)」에서 원추리가 사슴이 먹는 아홉가지 해독약초 가운데 하나라고 하여 사슴이 먹는 파라고 하였다.
원추리는 습기를 몰아내고 소변을 잘 나가게 하며 열을 내리고 콩팥과 방광의 돌을 녹아 나오게 하며, 갈증을 멎게 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뚫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우울증을 낫게 한다. 그러나 약성이 온화하여 즉효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효과가 천천히 나타난다.
원추리 잎은 뿌리와 거의 같은 효과가 있으며 독이 없다.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은 증상을 없애고 소화를 잘 되게 하며, 변비를 없애고 소변을 잘 나가게 한다. 소변이 붉고 탁하게 나오는 것과 황달, 부종을 낫게 한다.
신선한 것 20~40g을 물로 달여서 먹는다. 마른 것은 5~10g에 물 1.8ℓ를 붓고 절반이 되게 약한 불로 달여서 차 마시듯 마신다.
그러나 원추리 뿌리에는 독이 약간 있으므로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 너무 많이 먹으면 콩팥에 심각한 탈이 생길 수 있다. 말린 것을 기준으로 하루에 40g 이상을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옛 의학책에는 원추리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60℃ 이상으로 열을 가하면 독성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현저하게 줄어들므로 날로 먹지 말고 달여서 먹으면 안전하다. 부득이하게 날로 써야 할 때에는 황련즙이나 황백을 우려낸 즙에 하룻저녁 동안 담가두었다가 쓰면 독성이 줄어든다.
으아리인지 큰꽃으아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큰꽃으아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초여름의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큰꽃으아리의 흰꽃은 크고 탐스럽다. 처음 꽃이 필 때는 연한 녹색이지만 활짝 피면 흰색이 된다. 으아리는 그 해에 새로 자란 줄기 끝에서 꽃이 핀다. 긴 덩굴로 뻗어 나가는 줄기는 가느다랗고 다른 나무를 기대며 자란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큰꽃으아리는 꽃이 크기 때문에 화단에 심기도 한다. 흰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꽃이 아니고 꽃받침이 변한 것이다. 꽃잎은 꽃술처럼 가느다란 것이 수술 밑에 흔적만 남아 있다. 유럽에서는 으아리 종류를 개량하여 흰꽃은 물론 빨강, 노랑, 보라, 분홍 등 수없이 많은 원예품종으로 길러 냈다.
꽃 피는 기간이 길어서 오래도록 볼 수 있고 갖가지 나비나 벌 같은 곤충이 찾아 든다. 향기가 좋아서 화분에 심어 가꾸면 실내에서도 탐스러운 꽃과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한방에서는 위령선(威靈仙)이라 하여 약재로 쓴다. 당 정원 연간의 학자 주군소(周君巢)는 그의 저서 《위령선전(威靈仙傳)》에서 위령선의 효과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 기록을 보면, “위령선은 풍을 제거하고 12경락을 통하게 하며 아침에 먹으면 저녁에 효과가 나타난다.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사지를 가볍고 건강하게 하며, 수족에서 열이 날 때 열을 가라앉힌다.”고 했다.
이 책에서는 또 이런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다. 옛날 상주(商州)에 수족이 마비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십 수 년 간 걷지 못하고 있었다. 명의를 찾아다녀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은 환자를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 어귀에 데려다 놓고 그의 병을 고쳐줄 명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에서 유학 온 한 승려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환자를 보게 되었고,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여 환자의 맥을 짚어보고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 병에는 단 한 가지 약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이 여기 당나라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신라승은 그 약을 캐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온 산을 모두 뒤졌고, 고생 끝에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위령선이었다.
가족들은 승려의 말에 따라 위령선을 잘 달여 환자에게 먹였더니 며칠 만에 병세가 크게 호전되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위령선은 이 때부터 민간에 전해졌다.